
1945년 광복이 찾아왔고 사람들은 무엇인가 바뀌게 될 세상을 기대했습니다. 제주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국내에 조직망을 갖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산하의 인민위원회가(민위) 전국 각지에 수립되었고 제주 역시 그리되어 우리만의 정부수립을 준비했습니다. 다만 육지의 민위는 보다 과격하고 좌익적 색채가 선명했던 반면, 제주도의 그것은 좀 더 온건성향이 강했습니다.
이 와중에 한반도의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통치하는 미군정이 시행되었는데, 이들은 건준과 민위 모두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냉전이 막 태동하던 단계였고, 미국 역시 정보 부족으로 인해 공산주의, 사회주의, 좌익 이 세 가지에 대해 세부적 기준 없이 모두를 증오했습니다.

특히 건준의 여운형 선생은 좌익적 색채가 강했기에 건준은 처음부터 감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결국 건준은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내부의 분열로 주저앉게 됩니다.

46년 8월, 미군정은 전국적으로 치안력을 장악하고 민위의 세력을 축소 시키기 위해 제주를 도道로 승격 시키고 그에 맞게 경찰력을 증원시킵니다. 왜정 당시 100명 수준이던 경찰은 47년엔 3배, 48년 4,3사건 직전에 20배로 증강됩니다. 문제는 당시 경찰들이 왜정 당시처럼 국민을 무시하고 고압적이고 폭행을 서슴치 않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리고 46년 제주는 농사가 대흉작인 해 였는데, 반대로 인구는 귀환자들을 포함해 대거 증가하여 식량과 생필품 부족, 콜레라 등이 기승을 부려 노약자들의 죽음이 잇따르고 민심이 흉흉해져 갑니다. 특히 식량 부족은 전국적인 사안이었는데, 그나마 부족한 식량의 매점매석을 막지 못하는 등 미군정은 현실을 모르는 실정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46년 10월, 좌익세력이 강했던 대구를 기점으로 전국에 좌익 봉기가 터집니다. 폭정을 저지르던 경찰서가 불타고 경찰들이 맞아죽는 사태가 빈발했는데 제주는 이 움직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평소 경찰의 행실에 따라 사상자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육지에서는 이 때 좌익세력이 모두 철퇴를 맞고 급하게 덩치를 부풀리던 군대 내부로 숨어들었지만 제주의 좌익 세력은 그 세를 모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봉기를 주도한 남로당에 대해 좌익 내부에서도 결과없이 조직만 붕괴했다며 모험주의 망동 이라는 이유로 비난이 쏟아집니다)
육지는 이런 혼란에 휩싸여 있었지만 제주의 1946년은 다소의 혼란과 기근 속에 아직까지는 큰 사고 없이 지나갑니다.
하지만 대규모 살상이 없었을 뿐 각 가정마다 있었던 기근과 죽음은 제주도민 각자가 안고 넘어가야 할 산이었습니다.
ps) 첨부한 삽화는 강요배 화가의 제주4.3사건 삽화집 ‘동백꽃 지다'을 인터넷 검색으로 추린 것들입니다.
유채꽃 보다 덜 유명한 동백꽃이 4.3사건의 대표적 아이콘이 된 것은 이 책의 영향이 큽니다.
넷피엑스에는 판매하지 않지만 여타 패치 판매하는 브랜드나 홈페이지 에서는 동백꽃 패치를 아예 4.3사건 추모의 의미를 놓고 판매하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