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압이 계속되자 1948년 2월 말, 조천면 신촌에서 남로당 제주도당 책임자와 면당 책임자 등 19명이 모여 대표회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당시 도당 조직부장 김달삼이 무장투쟁을 제기했다.
시기상조라는 신중파와 강행하자는 강경파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12대 7로 무장투쟁이 결정되었다.
우리는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지 국방경비대나 미군에 맞대응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공격한 후 미군이 대응한 것이나 장기전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가 정세파악을 잘 못했다."
-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 출신 이삼룡의 증언

1948년 2월 말까지 남로당의 집단 봉기, 죄의 유무와 관계없는 경찰의 탄압과 고문, 서청의 행패가 이어지자 남로당은 제주도 총책 김달삼(위 사진)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할 것을 결의합니다.


무장봉기 규모는 남로당 산하 350여명 규모에 무장은 소총 10여정에 죽창과 도끼, 몽둥이 등으로 무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제주 각지의 오름에 봉화를 올리고 이 신호로 경찰과 서청 지부를 습격하기로 결의합니다.
그리고 48년 4월 3일 밤. 제주의 각 오름에서 봉화 불길이 치솟습니다. 훗날 말하는 '4.3사태'의 시작이었습니다.

봉화가 오른 그날 밤 새벽 2시. 남로당 유격부대(무장대)가 예정된 표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제주 24개 경찰 지소 중 12개 지소가 공격 받았고 서청 지부, 그리고 5.10 총선거의 관리직을 맡은 우익성향 민간인들의 집도 공격당합니다.
이로 인해 경찰 4명, 민간인 8명이 사망했고, 무장대 측은 2명이 사망합니다.
대규모 무장봉기 계획에 비해, 훗날 4.3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대규모 학살의 지옥'이라는 악명과는 대조적으로 4월 3일 최초의 인명피해는 적게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전 제주도에서 좌익 무장봉기이자 무장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미 군정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공식발표는 4월 8일이었지만 이미 이 당시 미 군정 내부에는 48년 12월 까지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계획을 잡아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대규모 무장봉기라니... 미군 측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진압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즉시 전남경찰 1백명이 응원경찰로 제주도로 급파되었고 이어서 경찰 간부후보생 1백명도 추가로 파견되었습니다. 국방경비대 9연대 역시 제주읍에 특별경비부대를 파견합니다.
또한 미 군정은 제주 도령을 발령해 제주를 왕래하는 선박이 단절되었고 해안가가 봉쇄됩니다. 이로써 제주는 완전히 고립됩니다.

이 혼란의 와중에 4월 14일 5.10 총선거를 대비한 선거인 등록이 실시되었고 전체 유권자 12만 7천여명 중 8만 2천명이 등록해 64.9%의 등록율을 기록했는데 전국평균 91.7%에 비해 크게 낮은 수치이자 전국 최하위 수치였으므로 제주도는 미 군정과 정치인들이 보기에 점차 '레드 아일랜드'로 굳어져 갔습니다.
미 군정은 맨스필드 중령을 통해 무장대에 대한 진압 작전을펼치도록 지시하는 한편, 무장대와의 협상도 실시할 것을 지시합니다. 하지만 무장대는 제주도민의 분노와 자신들의 정치적 야심 속에 일으킨 무장반란을 순순히 접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4월 18일. 선거사무소를 습격해 선거 관련 서류를 빼앗아 갑니다. 4월 19일. 조천면 신촌리 투표소를 습격해 방화합니다. 그리고 양측의 충돌로 희생자는 50여명까지 증가한 상태였습니다.
4월 24일에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항공 전단지로 무장대와 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지를 살포했습니다.
"나는 동족상잔은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자매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 (당시 전단지 내용)

4월 28일에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9연대장 김달삼은 만나서 대정면 구억리에서 만나 72시간 내 전투 중지를 합의힙니다.
여기서 이 사태가 마무리 되었다면 4.3사태는 1달 정도의 소란 정도로만 기억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협상 무드에 불기름을 붓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5월 1일. 훗날 말하는 오라리 방화사건이 벌어집니다. 오라리에 거주하던 우익청년단체 대동청년단의 간부와 그 가족들이 무장대에 의해 피살당하고 그 집이 불탔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대동청년단원들이 좌익 혐의자들의 가옥 10여채를 붙태운 것입니다. 또한 5월 3일에는 귀순하러 하산하던 무장대 행렬과 그들을 인솔하던 국방경비대원이 불상의 무장조직에 총격을 받았는데 이들은 훗날 경찰에서 조직한 귀순자를 방해하기 위한 특공대 임이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화해 없이 무장대와 끝까지 가기위해 충돌을 부추기고 있음이 밝혀졌고 이를 간파한 김익렬 중령은 미 군정에 보고했지만 오라리 방화사건에 분노한 미 군정에서는 이 보고를 묵살해 버립니다.
이로써 조기 화해를 위한 김익열 중령와 맨스필드 중령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갑니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이 민정장과 안재홍, 경무부장 조병옥, 송호성 준장을 대동해 제주를 방문합니다. 이때 유해진 도지사, 맨스필드 중령, 김익렬 중령을 만나 무장반란 재개(오라리 방화사건)에 대한 회의를 합니다.(5.5 최고수뇌회의)
경찰 측에서는 강경한 진압을 주장했지만, 김익렬 중령은 경찰의 과잉 진압과 이전부터 있었던 행패가 무장반란을 초래한 것임을 이야기 했고 선무공작을 통해 이를 해결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오라리 사건이 경찰의 후원을 입은 우익청년단체의 행위라는 증거를 내밀자 딘 군정장관은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라며 조병옥 경무부장을 압박합니다.
당황한 조병옥이 이것은 다 조작된 것이며 김익렬도 공산주의자 라는 주장을 하자 분노한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어 멱살잡이를 하며 회의장은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이 일로 김익렬은 회의 다음날 9연대장 지휘관에서 해임되고 후임으로 박진경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고급부관이 내정됩니다.
이런 5월 초의 혼란 속에서도 무장대는 화북리 선거관리위원장과 내도리 구장을 살해 하는 등 공세를 이어갔고, 이제 강경진압은 메인 노선이 되어버립니다.
좌우익의 혼란 사이에 버려진 제주도의 죄없는 주민들을 돌봐줄 사람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