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한 밤, 갓길에 세워진 경찰차 안에서 도넛과 커피를 먹으며 무전을 놓치지 않고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경찰관의 모습은 드라마나 영화, 만화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미국 경찰의 스테레오타입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 맨해튼 이스트빌리지 던킨도너츠 매장을 방문한 뉴욕 시 경찰국 소속 경찰관들.
(출처 : https://en.m.wikipedia.org/wiki/File:Cops_in_a_Donut_Shop_2011_Shankbone.jpg)
다양한 미디어에서는 캐릭터의 부각과 흥미를 위하여 과장된 각색을 하지만,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현실과 흡사하다 말할 수 있겠다.
미국 경찰과 도넛의 인연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흥미로운 전술적 배경이 얽혀 있다.
인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사건사고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거리를 차와 도보로 누비며 이를 막는 경찰관들의 직무 특성상 마음 편하게 자리 잡고 식사를 한다는 것은 사치와 같았다. 불시에 먹던 음식을 내려두고 현장으로 뛰어야 하는 경찰관들에게 식사를 정리하거나 다시 돌아와 먹을 때에도 부담스럽지 않은 “간식”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간식들이 있지만, 그중 도넛은 경찰관들의 요구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먹는 데에 수저나 식기가 필요하지 않으며, 국이나 소스처럼 흘러내리지도 않아 출동으로 자리를 떠야 한다면 대충 아무 데나 얹어두면 되었다.
따뜻하거나 식어도 똑같이 맛이 좋고, 범죄자를 쫓아 뛰며 뒤엉켜 바닥을 구르는 이들에게 필요한 열량은 당과 탄수화물, 지방으로 모자람 없이 채웠다. 그야말로 “경찰관의 완전식품”인 셈이다.
▲ 휴스턴 경찰국의 경찰견 유닛을 비롯하여, 몇몇 미국 경찰국에서도 도넛을 게임 속 아이템의 이름 같은 “Power rings(힘의 고리)”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출처 : https://twitter.com/houstonpolice/status/1136991740186042369)
도넛은 경찰관들의 근무시간과 근무지와 잘 어울리기도 했다. 1960년대 미국의 휴게음식점 중 자정 이후로도 영업하는 점포는 전체의 10%에 불과하였으며, 그마저도 장거리 화물차 운전사를 주 고객으로 삼는 공도변 가게였기에 경찰관들의 주된 근무지와 동떨어진 곳이었다.
반면에 도넛 가게는 유동인구가 많은 근무지역 내에 위치했고, 아침식사 대용으로 판매할 도넛을 준비하느라 새벽에도 영업 중이었다. 자정부터 일출까지의 시간동안 순찰의 명목으로 찾아가기에 이상적이니 야간 근무 경찰들이 도넛 가게를 방문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런 현상은 도넛 가게에게도 뜻밖의 전술적 이점을 안겨주었다. 언제 강도가 들지 모르는 야심한 밤에 홀로 가게를 지키며 도넛을 만들던 와중, 수시로 “무장한 법집행요원”이 찾아오는 상황은 점주에게 매출을 초월한 호재로 다가왔다.
▲ 가게를 잘못 고른 강도와 대치 중인 샌디에고 경찰국 SWAT 팀.
자비 없는 살상과 관통력을 자랑하는 AR-15 계열 돌격소총으로 무장하였음에 주목.
(다행히도 비살상탄으로 제압 후 체포하였다)
기존의 “밤손님”들은 불시에 경찰이 들이닥치는 도넛 가게를 멀리하니, 도리어 도넛 가게들이 안전과 치안을 확보할 겸 야간 근무 경찰관들을 단골로 모시고자 커피 무료나 경찰 할인 등 프로모션을 제공하기도 했다.
적은 돈으로도 부담 없이 즐기는 맛과 열량의 결정체인 도넛과 잠을 쫓아주는 커피, 거기에 밤낮 없이 찾아가도 언제나 따뜻한 환대까지. 경찰관이 도넛을 마다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미국의 경찰들은 주나 소속을 불문하고 도넛 가게를 찾고 도넛을 들고 먹는 모습이 미국 전역에 흔한 일상처럼 자리잡았다.
미국 경찰의 이러한 풍토는 수십 년간 이어지며 오늘날 하나의 문화이자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이에 도넛 미식가로 공인된 미국 경찰은 자신들이 좋아하던 도넛을 범죄와의 전쟁을 이겨낼 “전투식량”을 넘어 새로운 용도로 쓰기 시작했다. 바로 홍보를 통해 친근감을 표현하며 시민의 신뢰를 얻기 위한 아이콘이다.
달콤한 도넛을 좋아함에 경찰이나 민간인의 구분은 없다. 이 공감대를 공략한 미국의 여러 경찰국은 자신들을 몰개성한 제복 속 피도 눈물도 없는 원칙주의자가 아니라 도넛을 매우 좋아하는 지역 사회의 이웃으로 알리고자 도넛을 홍보의 소도구로 응용하고 있다.
▲ 도넛을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모습을 연출한 미국 캘리포니아 주 링컨 경찰국의 홍보 사진.
하수구 속 광대와 빨간 풍선으로 스티븐 킹의 공포소설 「그것(It)」과 동명 영화의 고증을 잘 살렸다.
▲ 전설이 된 베네와 카운티 보안관실의 고충.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허가받지 않은 함정을 설치한 분, 부디 멈추세요. 저희는 이번 주만 해도 밴내터 보안관보를 두 번이나 구해주어야 했습니다.
또한 플라이 보안관보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미끼로 쓰인 파우더 도넛의 가루는 저희 초록색 제복에 묻으면 지우기 매우 힘듭니다.
이 민감한 사안에 대한 선생님의 협조와 이해에 감사드립니다.”
적어도 보안관보 2명이 함정에 희생(?)되었다.
▲ 2017년 만우절을 맞아 아이오와 경찰국이 만든 도넛 먹방 겸 만우절 행사 홍보 영상.
거짓말이 용인되는 만우절을 응용, 시민들이 도넛에 대한 사랑을 “거짓”으로 표현하면 도넛을 나누어주는 행사를 열었다.
만우절의 의의를 잘 살린 행사이자, 사회적 문제였던 “혐오 범죄”에 해당하는 언동, 행동이 무엇인지를 홍보한 모범적 사례로 손꼽힌다.
▲ 2018년 12월 31일, 미국 켄터키 주에서 발생한 도넛 트럭 화재 사건과 상심에 빠진 경찰관의 모습.
이후 크리스피 크림은 2019년 연초부터 우울과 절망에 빠진 렉싱턴 경찰국에게 도넛을 선물하며 슬픔을 달래주었다.
도넛은 그저 음식에 불과하다. 범죄자를 쓰러뜨리거나 출혈을 멎는 경찰용 장비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시가지를 누비며 현실적인 위기와 갈등을 해결하는 실전 전술가, 미국의 경찰들은 이를 악행을 제압하는 전천후 전투식량이자 시민들의 관심과 사랑, 이해를 얻는 아이콘으로 응용했다.
넷피엑스의 요원들에게도 이처럼 훌륭한 전술적 사고와 응용으로 적절한 도구나 수단을 구하며 이로 얻는 효과와 부산물까지 이롭게 사용하는 혜안이 싹트기를 응원한다.
댓글 5
이스라엘처럼 전투가 빈번하지 않은 한국에서 PMC의 역할은 국경 울타리를 지키는 것과 같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를 위해 현행 민간인의 총기 소지 금지에 대한 법적 규제를 PMC에만 해제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국내에서 PMC가 허용된다면 넷PX와 같은 민간 군용품 유통업체에 호재가 될 것입니다.
다만, 이근 전 해군 대위가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돌아온 것처럼
PMC와 같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 우리 국방을 맡기는 것이 신뢰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아직 PMC에 대한 철학이 정립되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것이 남베트남처럼 국방을 느슨하게 하는 시작이 되고,
결국 북한에 흡수되고 통일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회에서는 택티컬 에디터가 넷PX 요원들에게 PMC의 개념과 관련된 정신교육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국가가 경찰관과 소방관들의 복지를 늘렸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만우절을 맞아 생뚱맞은 글감을 준비해 본 Plumbum입니다.
전쟁에서 적에 대한 직접적인 저지력은 없는 병참, 보급이 생각보다 중요한 행위인 것처럼
어쩌면 먹고 사는 것만큼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전술적 행위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 말에 보면 "먹고 살기"나 "밥벌이" 등
생활을 영유하는 행위를 식문화에 빗대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다양한 식문화가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총기 난사, 혐오 범죄, 마약 관련 범죄 등
도심 전술의 극한직업, 미국 경찰들의 식문화를 조명해 보았습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 읽고 즐기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재미있는 글로 요원분들에게 즐거움을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즐거운 만우절 되시기 바랍니다.